The Great Stone Face
증조부 호당의 문집(2024.1.1., 문예원)
약간 개인적인 면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은 사실 2018년 봄에 적은 것입니다. 그 당시에 저는 제19대 충남대학교 총장 선거(2019년 11월 28일 선거)에 후보로서 출마를 꿈꾸며 제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 보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언론보도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뉴스 티엔티([단독] 충남대 총장선거, 예비 후보군은?), 디트뉴스(충남대 총장 후보 '하마평' 9명은 누구?), 굿모닝충청(올 11월 총장 선거 충남대·한남대… 후보는?).
저는 1964년 전북 고창에서 3남 4녀, 7남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학문을 즐기던 종갓집입니다. 한학을 하시고 시를 즐기셨던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밑에서 유년 시절 엄한 유교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천자문을 외웠고 쓸 줄 알았습니다.
태어나 자란 곳 인근 아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근처의 고창북중학교로 배정을 받아 1년을 마친 시점에 아버지께서 전주로 전학을 시키셨습니다. 전주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평준화 이전 마지막 세대로서 전주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니 아버지께서 크게 기뻐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운도 따라 저도 부모님도 원하던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86세대의 일원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나 유신독재가 끝나고 신군부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대적 상황을 두고 크게 방황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1년을 보내고 2학년에 진학하면서 학과를 독어독문학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괴테, 실러, 헤세, 카프카 등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독일어 원서로 읽는 즐거움이 커가던 중, 3학년 때에 언어학(독어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게 되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학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는 칠남매의 대학 등록금을 대기에도 힘에 부치는 것이 현실이기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씀을 부모님에게 드렸을 때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유학 생활을 하던 1993년 아버지는 63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갑자기 돌아 가시는 바람에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회한이 밀려 옵니다. 아버지가 몹시도 그립습니다.
석사과정을 다닐 때부터 "나보다 뛰어난 학자가 되라"는 지도교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큰 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고 1990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농부의 아들이 유학을 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는 본인의 고생도 양념으로 적당하게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유학 중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슬픔이 있었지만 공부에 진척이 많아 생활비에 연구실까지 주는 파격적인 독일의 장학금을 받아 유학생활을 무난하게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대학과 대학원 과정에서 그리고 독일 유학 중 장학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류병래는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만큼 저는 대한민국과 독일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사회를 위하여 기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있습니다. 학위논문을 튀빙엔대학교에 제출하고 심사 중이던 1995년 뒤셀도르프대학교에서 전임연구원과 전공강사(Lehrbeauftragter)로 초빙되어 거기에서 짧았지만 굵게 독일의 석·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경험은 학생이 아닌 독일 교수들의 생황과 독일 대학시스템 내부를 맛볼 수 있었던 것으로 지금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1997년 귀국하여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다가 대전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을 하던 중 선임연구원으로 정식 연구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인문학 전공자가 대한민국의 최첨단 전자통신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간으로보면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 귀중한 경험은 저에게 공학적 마인드도 갖춘 열린 학문관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의 학자의 길을 가는 데에도 매우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1999년 9월 한참 나이인 35세에 충남대학교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부임 한 후 10년은 열과 성을 다해 부족한 공부를 메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우리 충남대학교에 재직한 지 벌써 20년이나 흘렀으니 말 그대로 세월이 화살과 같습니다. 대전은 저의 고향은 아닙니다만, 지리적 특성에 힘입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저는 일찌기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타지에 나가 공부하였고, 대학교는 또 서울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다녔고, 박사는 또 외국에서 한 터라 고향이 아닌 지역에 와서도 지역 발전과 후진 양성에 기여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대학과 지역에 제대로 기여하는 일을 제 인생의 숙제로 생각하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담아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진정성과 책임 의식을 항상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맡든지 책상 뒤에 앉아 도장만 찍는 역할만 하지 않고 몸을 던져 결과를 보여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하신 여러분,
부임 5년이 지나면서 학교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저는 우리 충남대의 구석 구석까지도 알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습니다. 지금까지 학교 안과 밖에서 현실 경영 문제를 진단 해결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는 학교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행정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인문대학 부학장(선임학과장)과 계열부장을 맡아 행정 경험을 하나 하나 익히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 조류에 휩쓸려 궁핍한 시대에 접어든 인문학은 내적 외적으로 다양한 갈등 요인이 상존해 다른 어느 대학보다 갈등조정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역대 최연소 인문대학장으로서 이러한 갈등조정 능력을 키우는 데에 크게 도움을 받아 지금은 스스로 맷집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문대학장, 인문학연구원장, 전국국공립대학교인문대학장협의회장을 지내면서 소통과 화합에 기초한 대학경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리더의 정직성을 통한 투명성의 확보, 이에 따른 공정성의 제고, 그리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구성원 사이의 합의 도출이 대학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미치는 곁정적 요인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인문대학장협의회장 임무를 수행하면서 교육부 및 기획재정부, 국회, 연구재단과 긴밀하게 협의를 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단과대학 재정지원사업인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사업)의 마스터플랜을 짜는 연구책임을 맡아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두번의 공청회를 개최하고 600억원의 예산을 확보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등록금 책정위원장과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충남대 전체의 예산구조를 파악하게 되었고, 공간 재배정 작업을 수행하면서 건물, 시설과 장비의 현실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CORE사업에 우리 대학인 1차 고배를 마셨을 때에는 우리 충남대의 지역과 중앙에서의 위상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이기에 재도전 끝에 CORE사업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수님과 직원 여러분들 편에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 구성원의 하나된 마음이야말로 우리 충남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필수요건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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